이중섭 탄생 96주년 구글 메인.

 

 

이중섭

 

서양화가. 호는 대향. 평안남도 평원 출생. 1937년 도쿄분카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여 재학중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여 신인으로

각광 받았다. 40년·43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수상하였으며,

45년 귀국하여 원산에서 일본여성 이남덕(야마모토)과 결혼하였

다. 46년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6·25

때 원산을 탈출, 부산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헤어져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53년 가족들과 만나기 위하여 일본에 밀항하

였으나 얼마 후 귀국하였다. 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그는 주로 소·닭·게·어린이·가족 등

을 그렸다. 힘차고 대담한 터치와 탄력적이고 단순화된 형태, 원

색의 선명함으로 인간 내면을 표현한 그의 작품세계는 향토성이

강하며 동화적인 동시에 가족에 대한 정감이 잘 나타나 있다. 또

한 서구 근대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하였다. 숱한 에피소드와

강렬한 개성이 풍겼던 그의 예술성은 70년대 이후 평전과 연극·

영화로 기려지고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떠나는 가족》 등이 있다.

 

이중섭의 생애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사

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1920년- 5세가 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때부터 그림그리기

를 시작하였다.

1923년- 마을의 서당을 다니다가 8세에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가

서 종로보통학교에 입학. 선구적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

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초등과정을 같이 지내며 그 집에 가서 김

찬영이 쓰던 화구와 미술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1929년- 14세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

교에 입학. 중등 과정 내내 소를 즐겨 그려서 학생들과 하숙생

사이에서 소에 미쳤다는 평을 받았다.

1931년- 16세 미술과 영어 과목의 교사로 부임한 유화가 임용련

과 그의 부인 백남순에게 미술에 대 한 재능과 열의가 인정되 어

집중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린다. 이후 내내 한글 풀어쓰기

로 이름 쓰기를 실천한다.

1935년- 20세에 몇몇 동급생과 공모하여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

서 낡은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불을 지름. 졸업기념 사진

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고 사진 첩은 취

소 되었다. 졸업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사립 테이 고쿠 미술학

교에 입학.연말에 다친뒤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

1936년- 21세 사립 예술대학인 분카 가쿠잉으로 옮김. 이규상등

이 동기,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인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

생이었다고 함. 피카소와 루오에 심취하여 이들의 그림 을 모방

하여 교수가 힐난한데 항의하기도 함. 실제로 학교 에서는 배운

것이 없고, 상급생인 문학수를 통해서 알게된 화가 쓰다 세이슈

에게 오가면서 배운것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회고하기도 함. 쓰다

에게서 사숙하던 송혜수를 알게됨

1938년- 23세 5월 일본인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 自由美術家協

會의 2번째 공모전에 응모하여 입선 하고, 협회상을 받았으며,

문학수와 함께 일본의 여러 평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는다.

조선인 출품자는 김환기, 박생광, 유영구, 주현이다. 이 무렵 같

은 과의 후배인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다.

1940년- 5월에 공모전에 <누운 여자>, <소의 머리>, <서있는 소

>, <작품1>, <작품2>를 출품하다. 10월 경성에서 열린 제4회 공

모전에 <서있는 소>, <망월>, <소 의 머리>, <산의 풍경> 을 내

어 길진섭, 김환기, 진환으로부터 찬사를 받다. 연말에 원산 에

머물면서 마사코에게 그림으로만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

1941년- 26세 3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활동하던 조선인 유화

가 김종찬, 김학준, 문학수, 이쾌대, 진환, 최재덕과 조선신미

술가협회를 결성하고, 5월에 창립전을 가짐. 이 무렵 이쾌대의

형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가르침과 형의 우

리 문화재 수집 활동에 영향을 받아 휴가차 귀가 하면 개성 박물

관에 다니면서 스케치에 몰두 4월 5번째 공모전에 <망월>과 <소

의 여인>을 출품. 회우로 추대됨.

1942년- 6번째 공모전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 (遲日)>들을 출품하다. 이 무렵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

대이 상향'이라는 뜻의 "대향"으로 고치다.

1943년- 28세 3월 7번째 공모전에 이대향이라는 이름으로 <소묘

1>에서 <소묘6>과 <망월>, <소와 소 녀>, <여인>을 출품.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평양출신의 화가들인 김병기, 문학수, 윤

중식, 이호궁, 황염수와 6인전에 참가. 이 후 그림을 그리 면서

징병이나 정용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일하기도 함. 연필화 <

소년>, <세 사람>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1945년- 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와 5월 결혼

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 다. 최재덕과 지금의 미도파

백화점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림.

1946년- 2월 조선예술동맹의 회원부원이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

교사 가 되었으나 금새 사직.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원산문 학가동맹 소속의 구상등이 펴낸 공동시집"응향(凝香)"의

표지 에 어린이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다. 이로 인하여 이듬해

이 책에 실린 시들이 복고적이고 반동적이라 하여 북조선문학 가

동맹의 규탄을 받을 때 같이 거론되기도 함. 이 무렵 화가 김민

구, 이호궁, 한 묵등이 자주 들렀고, 화가 지망생 김영환, 김종

식 등이 찾아와 그림 품평을 받기 시작함.

1947년- 32세 6월 친구 오정환의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를

그림. 평양에서 열린 8.15기념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

음. 아들 태현 태어남.

1949년- 34세 봄 태성 태어남.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함.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 소 주인에 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열린

전시회에 함께 출품한 것이 인연이 되어 화가 박수근과 사귐. 부

인이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친일파라는 지목을 받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자주 술을 마심.

1950년- 6월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에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위협에 부인과 두 아들, 장손인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감.

1951년- 36세 부산에서 제주까지 배편을 제공해 준 선주가 사느

서귀포 까지 여러날을 걸어서 도착하여 그 집에서 두 달간 머물

다. <피난민의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것임. 이곳에서 그린

그림으로는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 부인과 아이들이 영양

부족으로 병이 드는 등 곤란이 계속되었으므로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 갔다가 곧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엽서가 시작됨. 박고석, 손응성, 한묵과 기

조동인을 결성하고 전람회를 염.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일본을 왕

래하는 선원인 오산의 후배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

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빛을

지게 됨. 3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 유영국,

장욱진의 그림과 함꼐 수상하다고 하여 계엄기관의 조사를 받다.

8월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끝에 일시 체류 허가를 얻어 일

본으로 갔다가 곧 돌아옴. 이것이 가족과 마지막 만남이 되다.

유강렬의 제의를 받아 통영으로 가서 안정을 얻게 되어 풍경화

등을 제작하고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다. <흰 소>, <황소>는 이

때의 작품임.

1954년- 39세 봄에 함께 공모전에 함께 출품한 인연이 있는 화가

박광생 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

. 서울로 가서 6.25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대한 미술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 호평을 받음.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 유화 40여점. 은지화를 비롯한 그림을 비롯한 소묘 50여점을

내다. 전시는 호평을 받았으나 당국은 은지화를 춘화라고 하여

철거하도록 했으며 그림값을 떼이기도 하고 술로 지내다가 빈털

털이가 됨으로써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짐. 5월에 미국공 보원에

서 개인전을 가짐. 저조한 실적, 영양 부족으로 인해 극도로 쇠

약해 성가병원 정신과에 보내져 1달여 입원. 거식증 등의 증상으

로 정신병자라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반박하기 위하여 연필로 자

화상을 그리다. 곧 서울로 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다시 정

신병원으로 다시 보내졌다.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

. 이 때 간장염에 금물인 술을 계속마셔 화달이 심해짐.

1956년- 41세 영양 부족과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 대구전을 관장한 미국인 맥타가트에 의하여 미국

모던 아트 뮤지엄에 기증된 은지화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

월 6일 지켜보는 사람없이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망우리 고동묘지에 묻다.

1957년- 이중섭을 따르던 차근호가 새긴 묘비가 세워지다.

1960년-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 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유작전과 작품집

이 마련되다.

1973년- 이중섭의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정부에 의해 건국 훈장이 수여됨.

1979년- 젊은 시절 애인에게 그려 보낸 엽서, 그림과 일본의 가

족 에게 맡겼던 은지 그린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서울, 대구, 부

산에서 열리다.

1980년- 이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번역되어 출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림.

1997년- 제주도 서귀포시가 이중섭이 살던집을 복원하여 개관하

다.

 

 

 

 

 

 

 

                                                                          흰 소.

 

 

                                                                            가족.

 

 

                            이중섭 사망 5개월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스케치북에서 발견된 그림.

                      

고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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